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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死LB006] 애니메이션에 날개를 다는 플래시5 & 액션 스크립트 [ISBN 89-314-1580-X] 영진닷컴

이제는 사멸한 이름들 : 쇼크웨이브, 플래시, 디렉터, 오쏘링, CD롬타이틀

 

정보는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생명을 다한 책들을 폐기하기 전에 소개하는 자연死도서관의 제6호 서적은 영진닷컴에서 발행한 플래시 학습서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도 이제는 책의 내용으로서는 그 쓰임새가 없습니다. 역사적 사료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도 책의 소개보다는 책이 다루고 있던 '플래시'의 간단한 설명과 개인적 소감을 소개하려 합니다.

 

플래시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입니다. 이렇게 고유명사가 일반명사를 대체하는 경우를 '상표의 보통명사화'라고 합니다. 초콜릿이 발린 긴 막대 형태의 과자를 우리는 관성적으로 '빼빼로'라고 부릅니다. 사실 빼빼로의 원조는 일본의 과자 회사 글 리코社의 '포키'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글리코의 포키도 빼빼로이고 메이지의 프랑도 빼빼로라고 부를 겁니다.

 

플래시의 역사는 쇼크웨이브에서 시작합니다. 지금은 어도비에 인수된 매크로미디어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인터렉티브 툴과 그 규약입니다. 쇼크웨이브는 인터넷이 존재하기 전에 개발되어서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에도 업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혹시 CD롬타이틀이라던지 LD로 불리는 레이저디스크라는 미디어를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미디어를 만들기 위해 서는 오쏘링이라는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플래시는 이 오쏘링에 사용되는 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DVD 미디어로 영화를 보는 상황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DVD를 플레이어에 넣고 영화를 보려면 최초에 컴퓨터 화면에서 마우스를 움직이듯 리모컨으로 메뉴를 선택하고 챕터를 고르고 하는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있을 겁니다. 이 인터페이스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바로 오쏘웨어들이고 그 원조가 쇼크웨이브였습니다. 그리고 플래시로 그 명맥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CD롬 타이틀을 만들 때는 '디렉터'라는 프로그램을 주로 사용했고 디렉터에서 사용하는 스크립트 언어의 이름은 '링고'였습니다. 자바스크립트처럼 간단한 상호작용을 구현하는 언어였고 이후 플래시에서는 액션 스크립트로 그 형태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도 워낙 컴퓨터로 작업한 세월이 길다 보니 이 CD롬타이틀을 만드는 작업을 디렉터로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디렉터는 CD롬이라는 저장된 미디어에서 사용되었고 그 기반을 인터넷으로 옮긴 것이 플래시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오프라인 기반의 어도비 애니메이트로 변화했습니다. 플래시는 2021년 인터넷 세계에서 완전히 퇴출당하였습니다.

 

최초 개발된 목적은 상호작용형(인터렉티브 interactive)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동영상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 적은 용량의 데이터로 가벼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플래시는 동영상과 상호작용을 구현하기 어려웠던 과거 인터넷에서 두루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홈페이지가 텍스트와 이미지 기반일 때 플래시는 화려한 화면전환도 움직임으로 사용자들의 눈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하드웨어와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점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사실 플래시는 과도기적인 기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열린 구조 덕분에 오히려 유저들에게 마개조되면서 생각지도 못한 기능들에 플래시가 이용되면서 정체성도 잃어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보안 문제 때문에 아예 퇴출이 되었습니다. 집안에서 잘 쓰던 기계를 갑자기 광장에 끌어내서 여러 사람들이 멋대로 사용하게 두다가 범죄에 잘 이용된다면서 사용 중지 시켜버린 상황입니다. 결국 플래시는 애니메이트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집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벡터 기반의 가벼운 애니메이션을 만들기에는 이만한 프로그램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는 영상으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그동안의 TV 시대에도 주요 콘텐츠는 영상이었지만 이제는 일반인이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플래시 같은 애니메이션 제작 툴은 설 곳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과거와같이 쓰는 사람만 쓰는 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플래시로 만든 간단한 애니메이션으로는 사람들의 열광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플래시의 액션 스크립트는 자바스크립트와 그 구조가 매우 비슷합니다. 매서드에 옵션을 추가하는 형식이라든지 오브젝트에 값을 주는 방식이라든지 자바스크립트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자바스크립트를 공부한 분이라면 쉽게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플래시 외에는 쓸 일이 없는 스크립트 언어라는 점과 액션스크립트가 버전업을 할 때마다 멋대로 바뀌는 부분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MX버전에 들어오면서 스크립트 자체가 아예 새로 만들어진 수준으로 바뀌어서 저도 적응하는 데 한참 걸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너무 기반이 없는 언어가 살아남기는 어려웠고 다른 언어가 더 훌륭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프로그래밍을 위한 언어도 아니기 때문에 보안에도 문제가 있었고 모바일 환경으로 옮겨가는 컴퓨터 사용 환경에도 대응을 못 한 느낌입니다.

 

저는 플래시라는 프로그램에 정말 애착이 많습니다. 제게는 인생을 바꿔준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20대 초반에 프로그래밍, 컴퓨터 그래픽, 음악, 영상 제작 등 너무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방황하던 때에 플래시가 등장해서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작업으로 엮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습니다. 처음으로 의뢰를 받아서 한 작업도 풀플래시 사이트였습니다. 뭘 할지 몰라서 방황하던 아마추어 작업자를 인터렉티브 웹사이트 제작 전문 작업자로 만들어준 프로그램이라서 플래시는 제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프로그램입니다.

플래시가 등장한 초창기에는 홈페이지 전체가 움직이고 음악이 나오며 사용자의 마우스 포인터에 반응한다는 것은 정말 센세이션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게 플래시가 달아준 날개로 정말 오랫동안 즐겁게 일을 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클라이언트분들이 완성된 작업물을 보고 입이 벌어지는 장면은 정말 뿌듯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느 날 웹 브라우저 상단에 뜬 플래시의 지원이 중단된다는 알람은 참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기술은 인생과 같이 흘러가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프로그램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이 사회에 끼친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유산을 통해서 현재에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이제 폐기되지만, 이 책이 사람들에게 뿌린 영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