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는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생명을 다한 책들을 폐기하기 전에 소개하는 자연死도서관의 제3호 서적은 성안당에서 발행한 3D 그래픽 프로그램인 스트라타 스튜디오 프로의 학습서입니다.
스트라트 스튜디오 프로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본격적인 컴퓨터 생활을 매킨토시로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첫 컴퓨터를 산다면 매킨토시로 사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매킨토시를 할부로 구매했습니다. 대학교 합격이 결정된 후 운 좋게도 학원강사와 개인과외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 수익으로 인생 첫 컴퓨터 구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폰 이전 시대에 애플이 만든 제품은 매우 특이한 소수만이 사용하던 제품이었습니다. 전 세계 컴퓨터 사용 인구 중 극소수가 사용하는 매킨토시를 그것도 한국에서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매킨토시가 사용자가 많은 분야는 인쇄와 관련된 분야 정도였습니다. 쿼크 익스프레스로 대변되는 DTP와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로 대표되는 2D 그래픽과 관련된 직업인 정도만 주로 사용했을 뿐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아니었습니다. 매킨토시를 사용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3D 프로그램을 매킨토시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스트라타 스튜디오 프로는 매킨토시 전용 3D 모델링, 렌더링 프로그램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런 책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시점 기준, 이 책은 과거의 상황을 유추하는 것을 도와주는 역사적 시료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시대에 스트라트 스튜디오 프로를 배우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프로그램을 구할 수도 없을 것이고 구한다고 해도 구동되는 과거 컴퓨터 환경을 만들어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글은 '라테 드립'과 '역사 이야기'의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자의식과잉으로 인해 입문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매킨토시로 컴퓨터를 시작한 것은 제게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컴퓨터 사용자들은 그저 따라 하는 방식으로 컴퓨터와 관련된 학습을 해왔지만 저는 다름을 이해하고 방법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컴퓨터를 학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료도 부족하고 도움을 얻을 방법이 없다 보니 인터넷에 매달리고 매킨토시 온·오프 모임이나 세미나도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그 와중에 참 좋은 분들과 인연도 맺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분들의 도움으로 컴퓨터 인터넷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H.O.T나 젝스키스 전성기 시절 뮤직비디오에 나올법한 매우 왜곡되고 과한 형태의 컴퓨터 그래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입니다. 당시는 기술이 처음 개발된 시점이다 보니 모형화 방식도 제한적이었고 개인용 컴퓨터의 사양으로는 작업 시도가 불가능한 일도 많았습니다. 워크스테이션을 늘 꿈꾸면서 살아왔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진은 범프매핑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당시에 범프매핑을 입히고 렌더링 된 이미지를 확인하려면 30분씩 걸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3D 모델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일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책에는 야무지게 애니메이션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내용은 지금 보면 한숨 나는 영아용 학습 자료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이지만 당시에는 이 세상에 없던 기술을 집에서 직접 구현해 본다는 것은 참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렌더링이 밤새 돌려둬도 끝나지 않는 일도 많았고 때로는 프로그램이 오류로 종료되거나 컴퓨터가 과도한 작업부하로 다운되기도 했지만 밤새 작업하고 자는 동안 렌더링을 돌리는 작업을 계속했던 기억이 납니다.
책의 목차입니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이상은 저 멀리 외부은하까지 가 있습니다. '퀵타임'이라는 애플의 동영상 프레임워크를 이용해서 가상현실 환경까지 만들어보는 것이 책의 내용입니다. 물론 지금의 VR과 비교해 보면 고전 게임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의 수준이지만 모든 것은 이 기술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냥 역사와 함께 생활해 왔기 때문에 개념이라는 것을 공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뭐든 처음 보는 것을 직접 해보면 그 과정이 역사 체험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분야도 고도로 발전해서 개인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는 수준의 고도화된 분야가 되었습니다. 난립하던 플랫폼과 프로그램들도 거의 한가지 형태로 수렴해서 중립화되었습니다. 과거와 같은 설렘은 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개인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을 쉽게 구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을 들였기 때문이겠지요. 스트라트 스튜디오 프로뿐만 아니라 셰이드, 라이트 웨이브, 3D 스튜디오 맥스, 마야 등 이제는 잊힌 여러 이름이 떠오릅니다.
저는 현재 블렌더를 사용합니다. 간단한 개인 작업 정도에만 활용하고 있습니다만 과거에 못 해내던 일들을 너무나 손쉽게 해낼 수 있는 것을 보며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블렌더는 오픈 소스 라이브러리로 만들어졌으며 전 세계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블렌더의 개방성을 통해 유저들은 각자 만든 기능을 공유하며 3D 그래픽의 생태계를 아주 풍족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글은 매우 개인적인 내용을 담은 글이 되었습니다. 소개한 책이 너무 매니악하다보니 내용을 다루기에는 의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을 다루는 책이다 보니 사용자의 이해를 도우려고 인쇄가 총천연색 컬러로 되어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을 교육하기 위해서 지금보다 훨씬 많은 재화가 들어갔음을 실감합니다. 책은 바로 폐기될 예정입니다. 이런 학습서는 누군가가 빌려 가서 돌려받지 못해 없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직 서재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정말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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