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를 가장한 주관적인 음악이야기 1탄 : 악보로 음악하는 시대는 끝났다
정보는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생명을 다한 책들을 폐기하기 전에 소개하는 자연死도서관의 제4호 서적은 도서출판 혜지원에서 발행한 악보 출력용 프로그램인 피날레의 학습서입니다.
제게는 음악가인 가족 구성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음악을 제일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대학교에 합격해서 졸업 후 공연자로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습니다. 작곡과 연주에 능통했지만, 음악 활동을 하는 중 늘 발목을 잡던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컴퓨터 활용이었습니다. 작곡가와 연주가에게는 특별히 컴퓨터 기술이 요구되지 않지만, 프로듀싱하는 영역부터는 컴퓨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프로듀싱까지는 아니더라도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자신의 연주를 녹음하려면 기본적인 컴퓨터 기술이 필요합니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컴퓨터 음악과 관련된 학습서들이 많습니다. 많은 시도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 책의 주인은 제가 아닙니다. 저도 뮤지션 생활을 꽤 오래 했고 데모 작업은 직접 개인용컴퓨터로 해왔습니다. 지금은 음악을 업으로 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취미로 녹음 작업은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음악 프로듀싱 프로그램들을 사용해 봤지만, 저는 피날레를 사용해 본 일이 없습니다. 컴퓨터로 음원 파일을 만들 목적이라면 피날레보다는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피날레로 가장 잘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은 악보입니다.
아마도 이 책의 주인이 피날레를 공부하려 했던 이유는 주변에 고전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고전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은 악보를 정말 귀신같이 봅니다. 인간 시퀀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악보라는 데이터를 넣어주면 결과물은 자동으로 뽑혀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소위 '초견'이라고 불리는 개념이 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악보를 바로 연주가 가능한 수준을 말합니다. 악기가 아닌 노래로 하게 되면 초견이 아니라 시창이라고도 합니다. 말 그대로 악보를 볼 수 있는가를 따지는 개념입니다.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악보를 보는 것에 그리 능통하지 않습니다. 악보를 잘 보려고 노력해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음악 활동은 해왔습니다. 해외 록 씬에서는 악보를 전혀 보지 못하지만, 작곡이나 연주를 잘하는 뮤지션들이 많습니다. 고전 락의 아이콘이었던 오지 오스본은 늘 입으로 흥얼거리는 것으로 곡을 썼고 역대 최고의 베이스 테크니션으로 불리는 빌리 시헌은 오선지 악보를 읽지 못한다고 과거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물론 오지는 다른 악기 주자나 프로듀서의 도움을 통해 흥얼거림이 악보 화가 되었고 빌리 시헌은 인터뷰 이후에 오선지를 잘 읽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제의 본질은 따로 있습니다. 결과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굳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심지어 집에서 구닥다리 라디오로 녹음하더라도 음원 파일만 만들어낼 수 있다면 과정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구닥다리 라디오로 음원 파일을 만든다면 음질이 나쁠 것이고 배포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컴퓨터를 이용하는 이유는 효율성이 좋기 때문입니다. 음원을 만들기 위해서 구축해야 하는 환경이 간단해지고 녹음한 소스들의 가공이 쉽고 작업 중 생기는 시행착오를 되돌리기도 쉽습니다.
피날레는 악보가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컴퓨터로 출력하는 악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피날레는 가독성이 좋습니다. 책에 나오는 출력용 오선지 악보를 만들려면 이만한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악보와 소리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 굳이 악보를 거쳐 갈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인간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엄청나게 감성적이고 복잡하고 세밀한 일입니다. 그 뉘앙스를 악보로 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비브라토를 넣더라도 사람마다 아주 작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하나 악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결국 아름답게 들리는 음악은 악보로 적을 수가 없습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작동하는 시계 소리에 마음이 움직이고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악보를 보고 연주를 해도 안보상에 없는 '그 무언가'가 사람마다 다르게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북한의 초대형 매스게임이 압도적인 장관을 보여주지만 인간적인 감성을 자극하지는 못합니다. 음악 작업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좋은 곡을 듣고 연주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면 제일 먼저 악보를 찾아보게 됩니다. 하지만 모든 곡이 악보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악보를 만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렇게 악보를 다 만들고 나서 연주를 해보면 악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미묘한 표현 없이 따라해본 음악은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악보는 중요합니다. 인쇄물이나 간단한 구조와 내용을 보여주고 후대로 전승하고 발전시키려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악보를 이용해서 음원을 만들겠다는 시도는 애초에 방향성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미디로 표현되는 작업을 해보신 분이라면 공감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디 작업을 할 때 진짜 악보대로 음표를 찍으면 제일 좋지 않은 결과물이 나옵니다. 미디 작업을 하던 과거에는 어떻게 하면 컴퓨터답지 않게 작업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과거의 컴퓨터 음악은 어떻게 하면 악보를 벗어나서 매번 다르고 조금 빗나가게 작업할까를 고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악보를 벗어나야 감동적인 음악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음원의 이야기입니다. 학습 용도라면 기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음악을 누구도 학습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영혼을 해방하기 위한 일인데 악보에 가둬두려는 것이 우스운 일입니다. 결국 그렇게 고전음악 전공자들 위주로 열심히 사용되던 악보 출력 프로그램은 지금은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채보나 악보와는 인공지능에 시키는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악보를 입력하면 연주하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닌 기계가 하면 됩니다. 후대로 음원을 전승하기 위해 악보 화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이라는 녹음과 재생이 가능한 기기를 늘 들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늘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새로운 기술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사진을 찍을 때 굳이 필름을 거칠 이유가 없고 이제는 회사에서 결재를 받기 위해 문서를 출력해서 도장을 받지 않습니다. 고전음악이 쇠퇴일로에 접어든 이유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콘서트홀이 악기의 일부라고 주장해 봐야 이제는 개인용 컴퓨터 DAW에서 반향 한 번 걸면 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로 만들어낸 앰비언스는 진짜 콘서트홀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주장해 봐야 인간 청각으로는 구분하기 힘든 수준으로 기술 발전이 되어버린 지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리본적으로 자연死도서관의 내용은 책 리뷰이지만 오늘은 컴퓨터 음악의 라떼역사시리즈로 이어가 봤습니다. 이미 사용 가치가 없는 책이기도 하고 이 프로그램도 2024년 단종되어 서비스 및 판매가 중단되었습니다. 악보의 시대가 끝난 것을 이제야 인정한 것이지요.
여러분 음악은 가슴으로 하는 겁니다. 음악 해보고 싶은데 일단 학원 가서 악보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노래건 악기건 작곡이건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남는 것이 없어도 마음은 즐겁고 시원해질 거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되고 삶이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음악의 본질은 그렇습니다.
책과 관련된 내용이 너무 부족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연관된 내용 간단하게 정리합니다. 피날레라는 악보 출력용 프로그램은 2024년 현재 단종되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지원하는 악보 양식만으로도 충분히 이 프로그램을 대체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간략하고 깔끔하게 만드는 작업인 악보 출력과정과 복잡하고 균일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음원 작업은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이미 과거에도 인지되고 있었습니다. 이 책에도 컴퓨터 음악과 관련된 전반을 소개하고 있으며 뒷부분에는 아예 사운드포지와 소나 리즌 같은 다른 프로그램의 사용법도 다루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서 다룬 프로그램들은 현재 모두 쇠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폐기될 예정입니다. 현재로서는 폐지 이상의 가치가 없습니다. 과거 앙코르와 함께 자웅을, 겨루던 전성기를 떠올리면서 폐기하기 전에 마지막 흔적을 남겨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