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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死LB002] 컴퓨터강의록 한글97 [ISBN 89-7467-567-6 93560] 도서출판 삼각형

정보는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생명을 다한 책들을 폐기하기 전에 소개하는 자연死도서관의 제2호 서적은 도서 출판 삼각형에서 발행한 워드프로세서 학습서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글이라는 프로그램과 파일 형식을 싫어합니다. 호환성이라는 것은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이슈에서는 가장 큰 덕목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폐쇄와 독점은 늘 개혁과 발전을 억누르게 됩니다. 사실 한글이라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이 제국을 만들기 위해 자체적인 규격을 강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계 공통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하는 기준들은 어쩌면 최강자의 독식이 끝난 후에 생긴 평화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은 현재 시점에서는 역사적인 사료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책이 아닌 워드프로세서 한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보려 합니다.

 

이 프로그램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한글이라는 프로그램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시대적인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글은 갈라파고스섬과 같은 생태계가 되어버렸습니다. 한글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확장자 hwp라는 문서는 한글로만 열 수 있습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열게 되면 레이아웃이 망가지거나 아예 내용이 표시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독자적인 폰트를 사용하는 것도 과거에는 문제였습니다. 윈도우즈의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기능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 프로그램 내에서만 사용되는 형태의 기능들은 호환성을 떨어뜨리는데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런 자체 기능은 다른 프로그램에서 열어봐야 한글에서 만든 형태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공공기관에서 한글을 기본 소양처럼 만들어서 과도하게 지켜준 것도 자체적인 혁신을 할 기회를 없애는 데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단위에서 사용해 주다 보니 세금으로 제품을 사주는 구조가 되었기에 독점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글은 훌륭한 워드프로세서입니다. 그리고 태생부터 잘 못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대에 적응해서 혁신할 기회를 모두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글인 '한글'과 혼동되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아래아한글'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이런 민족의 고유어를 사유화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국제적인 위상을 생각하면 외국인이 한글로 문서를 작성한 일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한글을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가 외국에서 개발될 일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국내에서 개발이 되었고 그 기반은 매우 협소했습니다. 이후 외국에서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가 개발되었지만 문서가 예쁘지 않았습니다. 모국어 사용자가 만든 프로그램을 따라 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래아한글로 만든 문서는 참 예쁩니다. 문제는 아래아한글로 열어야만 예쁘다는 것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워드프로세서라기보다는 데스크탑퍼블리싱 툴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보기 좋은 문서를 만드는 툴에 가깝지 않았나 합니다. 그렇게 원어민이 자기들만의 툴을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노하우를 축적해 가며 발전시키다 보니 다른 외국에서 만들 툴이 경쟁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한글 문서는 한국 사람이 읽기 위해서 만드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고 빅데이터를 다루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아래아한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래아한글문서는 국제 표준화 기구 및 국제 전기 전자 표준 위원회의 인증을 받은 개방형 문서형식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공공데이터 개방 수준이 세계적임에도 불구하고 아래아한글이라는 존재가 이 장점을 전혀 이용할 수 없게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공공문서가 아래아한글 포맷으로 작성된다는 것은 이 데이터들을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토착 원주민의 수준 높은 민속놀이 같은 느낌입니다. 훌륭하지만 이 민속놀이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구입한 책은 아니지만 서점에서 구입한 낙인이 있는 것으로보다 가족 중 누군가가 구입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과거의 추억이나 곱씹어보고 폐기해도 되겠지만 그러기에는 요즘 느껴지는 이 프로그램의 악영향이 너무 크기에 한 번 짚고 넘어갔습니다.

 

이 책은 바로 폐기할 예정입니다. 서재 한쪽 구석에 숨겨진 것처럼 꽂혀있어서 아직 살아남았지만, 이제는 폐지 이상의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이 책과 함께 꽂혀있던 책들도 차근차근 마지막 소개를 하고 보내줄 예정입니다. 한동안은 오래된 책들 소개가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