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을 바꿔 입학한 두 번째 대학교 신입생 시절 산 컬러가이드북입니다. 컴퓨터 없이 디자인 작업을 하던 제 바로 이전 시대의 선배들을 그리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보는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생명을 다한 책들을 폐기하기 전에 소개하는 자연死도서관의 제13호 서적은 한국사전연구사에서 발행한 컬러 팔레트 가이드북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나무가 죽어버리면 시들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나무가 건강하더라도 영원히 피는 꽃은 없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은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아닙니다. 전공을 바꿔서 두 번째 대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학교에 판촉 활동을 온 출판사 직원을 통해서 구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글씨를 잘 쓰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디자이너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글씨를 잘 쓰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은 디자인 작업을 할 때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서예가나 화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법고시를 패스해야 법조인 면허를 얻을 수 있는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로스쿨과 의전원의 시대입니다. 모든 학문은 통합을 넘어서 융합연구를 중점으로 두는 다원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한 분야를 한 인간이 통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느껴집니다. 그만큼 인류가 쌓아온 지식이 크게 쌓였습니다.
노벨상을 개인이 단독으로 수상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한 인간이 밝혀낼 수 있을 지식이나 현상은 이미 모두 데이터화가 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역시 컴퓨터가 존재합니다. 컴퓨터 기술 없이는 이런 사회는 올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출판 작업을 하시던 아버지의 어깨너머를 통해 디자인은 처음 배웠습니다. 당연히 당시의 아버지는 컴퓨터로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먹줄로 선을 긋고 식자를 쳐서 문자열을 만들고 오프셋 필름을 모아서 사진을 합성하고 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디자인의 순서에 대한 개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의 시대가 지나고 제가 현업 디자이너로서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는 컴퓨터 없이는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컴퓨터 없이 책을 만들던 마지막 세대였습니다. 제 이전 세대 디자이너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전설적으로 선을 곧게 그리거나 귀신같이 동심원을 그려내는 무용담 등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솔직히 컴퓨터로 모든 것을 시작한 제 세대의 디자이너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능력이고 전혀 공감할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로 작업환경을 바꾸고서도 마우스로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던 선배가 갑자기 생각납니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 컴퓨터의 기능 중 단 한 가지만 쓸 수 있다면 저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언두(되돌리기 : undo)기능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 되돌리기 기능의 관점에서 과거 산업을 바라본다면 선배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가 됩니다. 과거에는 한 번 실수하면 바로 물자의 손해로 이어졌습니다. 가뜩이나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에 실수로 인해 손해를 끼친다면, 그것도 현업 종사자가 그런 실수를 한다면 너무나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컴퓨터 화면에 쓱 그려보고 마음에 안 들면 새로 그리지만 종이를 사용하던 과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경우는 너무나 많습니다. 영화계만 해도 NG를 내지 않는 능력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영화 촬영용 필름은 너무나 비쌌기 때문에 대사를 실수해서 새로 찍는 과정을 여러 번 겪는다면 단순히 시간과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산업적으로는 재사용이 안 되는 필름을 낭비한 것 자체가 너무나 큰 대미지였던 것입니다. 엑스트라 연기자가 촬영 중에 실수했다가 험한 일을 당한 상황은 비록 정당화될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나마 납득이 되는 부분은 있습니다.
저도 대학생 시절 사진 수업 시간이면 엄청나게 긴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프로급의 장비를 사용해서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포지티브 필름을 사용했었습니다. 필름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셔터를 한 번 잘못 눌러서 쓸모없는 사진을 찍게 되면 한 끼 밥값이 날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경험 없는 초보자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아무 걱정 없이 마구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지금은 정말 꿈만 같은 세상입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이제 인류는 더 빠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은 산업의 과정을 모두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기술과 작업환경의 변화는 매개 수단도 변화시켰습니다. 모든 정보는 열화 없이 너무나 쉽고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종이가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 책은 종이에 색을 인쇄했을 때 어떻게 보이는지를 모아둔 가이드북입니다. 과거 인쇄소의 모니터에는 고가의 캘리브레이션 장비를 설치되어있었습니다. 컴퓨터 모니터에 보이는 색을 책에 인쇄되는 색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물감의 혼합인 감산혼합과 빛의 혼합인 가산혼합을 일치시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습게도 기본 출력장치가 컴퓨터 디스플레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이런 노력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종이와 물감 그리고 필름의 나무에서 피던 꽃들은 다 시들어서 떨어졌습니다. 이제는 컴퓨터 디스플레이와 LED 그리고 데이터 장치의 나무에 다른 꽃들이 피고 있습니다. 완벽한 원을 깨끗하게 일정한 선으로 그릴 수 있는 능력은 소수의 사람이 큰 노력을 들여 긴 시간을 통해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래픽 프로그램을 구동하면 누구나 완벽한 원을 그리는 툴을 너무나 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지난 포스팅에서 다뤘던 일화를 꺼내봅니다. 해상 재난사고 발생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문서를 출력해서 자전거를 타고 대통령에게 가는 사람은 현대인이 아닙니다. 미개인입니다.
이 배색 대사전은 이미 그 쓰임을 다 했습니다. 쓸모없는 책이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제가 이 책을 참고해서 자주 사용하는 색은 컴퓨터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다른 방식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기존의 몸을 버리고 매트릭스 세상 속에 데이터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미 의미 없는 몸은 소개 후 폐기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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