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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死LB012] 만화로 배우는 바둑 [ISBN 정보없음] 삼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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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업데이트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 생명을 다한 책들을 폐기하기 전에 소개하는 자연死도서관의 제12호 서적은 삼원출판사에서 발행한 바둑학습서입니다.

 

책은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개념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만 많이 팔린다는 것은 시대정신을 어느 정도는 반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베스트셀러는 집단지성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바둑 입문서입니다. 대학교 다니던 시절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강변역의 어느 좌판에서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대의 저는 바둑이나 장기 같은 마인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세기말을 살아온 청춘은 자기파괴에 눈이 멀어서 극단적인 삶을 동경하기 일쑤였습니다. 당시 저는 헤비메탈, 익스트림 스포츠에 미쳐있었습니다. 일렉기타로 소음을 만들어내고 보드를 타고 지빙이나 트릭에 도전하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바둑에 입문하려고 이런 책을 샀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습니다.

 

바둑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교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학회실이었는데 학회실에는 늘 장기나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비역 선배들은 누군가가 장기나 바둑을 두면 탑골공원의 시니어들처럼 모여들어서 턱을 괴고 훈수를 하곤 했습니다. 또래의 커뮤니케이션이 너무나 중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화제에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세기말 청춘은 미숙함을 인정하고 남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허세와 자의식과잉으로 인해 불가능했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별로 관심도 없는 분야를 혼자 해보려는 시도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도 바둑을 어떻게 두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제는 바둑에 대한 사회의 관심도 사그라들어버린 것 같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국 이후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인공지능에 바둑을 승리한 유일한 인류인 이세돌 9단은 대국 8주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의 기보는 이제 바둑의 역사를 학습하는 용도 외에는 특별한 가치가 없어졌다. 바둑이 두 명이 함께 수를 고민하고 두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예술이라 배웠는데 인공지능이 나온 이후로는 마치 답안지를 보고 정답을 맞히는 것 같아 오히려 예술성이 퇴색된 게 아닐지 생각한다.”

 

이세돌 9단의 인터뷰를 읽고 바로 든 생각은 '이제 더 이상 바둑은 인간의 꿈을 담을 수 없구나'였습니다. 인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인공지능기술을 개발했고 인간의 꿈을 이뤘지만 기쁘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바둑은 인간계를 벗어나 버렸습니다. 이제 누구도 최고의 바둑기사가 될 꿈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세돌씨의 감상은 이곳 '자연死박물관'의 모든 전시물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결국 바둑은 죽은 거라는 말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진보합니다. 사람은 모두 죽지만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인공지능도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낸 성과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모든 일을 인간의 능력으로 해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만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컴퓨터가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알파고의 등장은 그 임팩트가 너무 컸습니다. 너무 파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대는 제4차산업혁명을 부르짖지만 결국 제4차산업혁명은 인류를 문명에서 쫓아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알파고의 등장이 파괴적이었던 이유와 같습니다. 압도적인 힘으로 인간을 쫓아낼 수 있다는 공포를 간접적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설정하기에는 인간은 이미 너무 멀리 왔습니다. 자동차를 통해 인간의 신체로는 얻을 수 없는 이동속도를 얻었지만, 그 누구도 자동차에서 공포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급발진 사고처럼 통제가 불가능하고 이유를 알 수 없다면 공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본래 공포는 미지에서 기인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인공지능에서 느끼는 공포의 핵심적인 이유는 통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책은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열리기 27년 전인 1989년에 발행되었습니다. 제목은 '만화로 배우는 바둑'이지만 만화가 나오는 부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만화 캐릭터가 유카타를 입은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발행된 책을 번역만 해서 발행한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잠시 읽어보니 바로 머리가 아픕니다.

 

'읍니다'의 표기가 계속되는 것을 보려니 읽기가 매우 힘듭니다. 책도 이미 삭아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먼지가 엄청나게 뿜어져 나옵니다. 금방 기침이 나와서 바로 폐기하기로 했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때 만약 내가 바둑에 빠졌다면?'이라는 공상을 잠시 해봅니다. 이 책을 왜 샀는지 당시의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길거리 좌판이었으니 엄청나게 저렴했을 것 같고, 만화라는 유혹에 쉽게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바둑을 통해 꿈을 꿀 수 있던 시대였으니 구입했을 겁니다. 이제는 아무 미련 없이 버려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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